기나긴 추석 연휴도 이제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친정집이 원래 제사를 지내던 집이라 그런가, 이런 명절 때에는 유독 전통주를 마시는 게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시댁에 가서 시아버님께 막걸리도 한 잔 얻어먹고 왔지만 결혼 3년차 새댁이 시댁 어르신들 앞에서 차마 '블로그 하게 사진좀 찍어갈게요~' 같은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애먼 마트를 뒤져 새로운 막걸리를 한 병 구입해 보았다. (여담이지만 시아버님은 양조장에서 직접 막걸리를 사다 드실 정도로 막걸리 애호가이시고, 올해 새로 pick하신 막걸리는 아주 맛이 좋았다. 리뷰하지 못해 아쉬울 정도로.)
우곡 생주 때 '생 탁주'에 대한 기억이 좋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생 탁주'를 한 병 구입 해 보고 싶었는데 국순당에서 나온 '옛날 막걸리'라는 이름의 누리끼리한 막걸리가 눈에 띄었다. 나는 '옛날 사람'도 아니고, 때문에 '옛날 막걸리'가 그립긴 커녕 무슨 맛이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순당이라는 대기업의 신뢰도와, '생탁주'라는 점이 끌려 이 제품으로 골라 보았다. 그러고는 혹여라도 청주와 탁주가 섞일까 노심초사하며 마트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2023.04.24 - [▶ 마시기/전통주] - 생 탁주를 아시나요, 우곡 생주
생 탁주를 아시나요, 우곡 생주
나는 막걸리를 좋아한다. 애써 나는 술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부정해왔지만 최근 취향이 조금 더 확고해졌다. 아, 나 막걸리 좋아하네? 그런데 하필 남편은 반대로 막걸리를 싫어한다.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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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서 냉장고에 잠시 조금 더 침전되도록 막걸리를 모셔 두었다가, 천천히 청주부터 한 잔 따라낸 후 탁주와 청주를 섞어 두번째 잔까지 따라 보았다. 마트에서 보았을 때도 당연히 조금 누리끼리한 색이었지만, 이렇게 따라놓고 보니 탁주가 정말 눈에 띄게 누런 색이었다. 그리고 탁주는.. 말하자면 약간 커피우유?같은 색이었다.
제목을 '할머니 댁 장롱맛'이라고 적으면서도 약간 고민이 되었던 부분은 이 제품도 누군가의 노력과 고민을 통해 만들어진 제품일테고 누군가는 이 제품을 만족스러워하며 마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할머니 댁 장롱맛' 보다 더 순화된 표현을 찾기가 어려웠다. 무 감미료, 무 합성착향료 라고 적힌 글자가 이렇게까지 반갑지 않을수가 있을까, 숱한 음료와 각종 제품들을 통해 감미료와 합성착향료를 32년간 마셔온 업보 탓인지 이 막걸리는 우리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못했다.
국순당의 '옛날 막걸리' 제품은 1960년대 전통 쌀막걸리의 맛을 복원한 제품이라고 한다. 이 제품은 전통 누룩을 일반 막걸리보다 3배 이상 사용해(그래서 이런 색상인것같다) 더욱 진하고 구수한 맛을 자랑하며, 인공 감미료 대신 기타 과당을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단맛을 낸다고 한다. 알코올 도수는 7.8%로 다른 막걸리(5~6도 정도)보다 약간 높은 편이고, 일반적인 막걸리보다 더 탁한 갈색을 띄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제품의 청주는 곡물 향과 함께 독특한 시큼한 향이 올라온다. 얼핏 맡았을때는 짙은 바나나향같지만 계속 맡다보면 상온에서 일주일 이상 푹 삭혀 오래된 바나나의 맛이 느껴진다. 이 뒤로 텁텁한 뒷맛이 남으며 쓴맛과 단맛이 지속해서 오래 남는데, '묵은 바나나'향의 뒤로 팥이나 오래된 집의 향기같은 맛이 따라온다. 이 제품의 탁주는 마찬가지로 오래된 바나나의 향이 주도적으로 앞서 드러나지만, 그 뒤로 누룩의 맛과 텁텁한 맛, 쓴맛과 묵직한 알코올 맛이 따라온다. 상부층이나 하부층이나 마찬가지로 오래된 맛을 정말 잘 구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맛이 그리웠던 사람이 있는걸까 하는 의문은 좀 들지만, 아무튼 오래된 맛을 표지에 실은 그대로 잘 구현해 내서 놀라울 정도이다. 또한 이 제품은 '탄산감'은 거의 없고 묵직한 느낌이 들면서도 '우곡생주'보다는 목넘김이 부담감이 덜하다는 면에서 좋은 균형을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맛과는 별개로) 고소하고 기름진 음식들과 좋은 궁합을 자랑한다는 말이 많던데, 일단 우리는 니트(안주 없이)로만 먹어보았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너무 독특한 맛에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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