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처음 시작할때는 술이 많으니 한병씩만 적어도 잔뜩 적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글이 쌓여 갈 수록, 블로그에 대한 내 애정이 깊고 진해지면서 그냥 술 맛이 어떻더라 가격은 어떻더라 하기만 한 글은 적기를 고민하게 된다. 이 술엔 어떤 추억이 있는지, 어떤 얘기를 담고싶은지, 누구와 어떻게 먹었는지, 어떤 분위기였는지.. 뭐라도 한 줄 더 적고싶어서 시기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은 어떤 글을 적을까 고민이 되서 한참을 적지 못했다. 대형마트에서 술을 얼마에 팔고있다는 내용이나 여행가서 구경한 술 이야기도 좋지만, 이 블로그에 본질적으로 적고싶었던 -술을 소개하고 술 이야기를 담는 글- 을 한참동안 잇지 못해서 고민이 됐다. 이것 저것 적어볼까 하고 사진도 찍고 임시보관함에도 담아봤었는데, 영 그럴싸한 글감이 따라붙질 않는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늦게까지 퇴근하지 않은 어제 물끄러미 술장을 한번 쳐다봤다. 어디 이야기 쓸 만한 녀석 있나 하고 맨 위부터 맨 아래까지 천천히 훑는데, 속눈썹 끝에 걸리는 술이 있었다. [글렌알라키 2010 싱글캐스크 퀘벡에디션(Glen Allachie 2010 Single Cask Selection Exclusive for Quebec)]. 제작년에 퀘벡주 몬트리올에 장기 출장을 다녀오면서, 노트르담 대성당 앞의 SAQ(퀘벡주의 술 판매상점)에서 구매했던 술이다. 당시에 남편이 샀던 건지, 내가 샀던건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대성당 앞의 SAQ에는 독특하고 좋은 술들이 별로 없는 편이었는데도 구석 메인 진열장 위에 놓여진 이 술이 유독 눈에 띄어서, 기쁜 마음으로 구매했던 기억이 난다.
이 술을 산 날짜가 2023년 8월 27일이니까, 산 지 2년 가까이 된 술인데도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출장을 가서 진행하던 일이 거의 마무리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지금에서야 이 술을 자세히 읽어보게 되다니, 기분이 묘하다.
이름 | Glen Allachie 2010 Single Cask Selection Exclusive for Quebec |
2010년 싱글캐스크(단 하나의 오크통에서만 병입)로 출시 퀘벡주 소비자를 위한 독점, 한정판매 상품. 2010년 증류. |
캐스크(오크통) | No. 2782 Cask Outturn : 702 Bottles Cask Type : PX Puncheon |
2782번 오크통. 해당 오크통에서 나온 술은 702병이 상품화되어, 판매됨. (전 세계에 702병만 출시되었다는 뜻) 오크통 타입 : PX Puncheon (※Pedro Ximenez_PX : 스페인 셰리 와인 종류, 고당도, Puncheon : 오크통 용량, 475~500L, Barrel의 약 2.5배) |
날짜 | Date Distilled : 29.03.10 Date Bottled : July 2022 Age : 12 Years |
증류된 날짜 : 2010년 3월 29일 병에 담긴(상품화된) 날짜 : 2022년 7월 숙성연수 : 12년 |
기타 | Natural Color Non chill filtered |
자연 색상(색소를 첨가하지 않음). 냉각 여과하지 않은 위스키 |
셰리 캐스크라고 하면, 이제는 거의 주류 위스키인것마냥 세상의 관심과 사랑을 쓸어모으고있는데 심지어 PX Puncheon Cask라니 어찌 맛이 없을 수 있을까. 자세히 보니 사온 뒤로 남편이 따서 마셔봤던것같은데(이런건 술테크를 했어야했나 싶은 마음이 살짝 스치지만ㅋㅋ) 2년 조금 안된 시간이라면 적절히 에어링도 되어있을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따라보았다.
술이 못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직한 직장에 자리를 잡게 해준 퀘벡에 대해 많은 애정이 쌓여서 그런건지, 더 사고싶어도 사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건지) 방금 전까지 열심히 운동하다 온 게 아까워서 조금만 따라보았다. 럼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단내와 마시자마자 입안으로 가득 퍼지는 오크향과 셰리향의 밸런스가 기가막히다.
어쩌지 진하다 했다, 이 녀석의 도수는 58.3도이다.
술이 훌륭해서, 좀 더 자랑을 하고싶은데 나머지 표현은 테이스팅노트로 적어보기로 한다.
테이스팅 노트
색상: 짙고 선명한 루비 브라운. PX 셰리 캐스크답게 일반적인 버번 캐스크 위스키보다 훨씬 더 진한 색감. 마호가니 계열의 붉은 빛이 강하게 감돔. (Dark Mahogany)
아로마: 잔에 따르자마자 강렬하고 농밀한 셰리 풍미가 확 밀려옴. 건포도, 말린 무화과, 대추야자와 같은 건과일의 응축된 단향이 중심을 잡고 있음. 그 뒤를 이어 다크 초콜릿, 모카, 브라운 슈거, 계피 향신료의 따뜻함이 입체적으로 퍼짐. 공기와 닿을수록 가죽, 구운 견과류, 흑설탕 시럽 같은 묵직한 노트가 올라오며, 아주 은은한 담배잎과 오크의 흔적, 간간히 후추의 스파이스도 느껴짐.
테이스트: 풀 바디의 진득한 질감이 입안을 감싸며 무화과 잼, 초콜릿 시럽, 토피 같은 진한 단맛이 입안 가득 번짐. 중반부로 넘어가며 다크 체리, 허브 스파이스가 조화롭게 펼쳐짐. 오크의 단단한 구조감과 함께 시나몬, 정향의 따뜻한 스파이스가 뒷받침돼서 단맛에만 머물지 않고 균형을 이룸. 캐스크 스트렝스 특유의 강렬한 풍미가 살아 있으나, 알코올 자극이 날카롭지 않고 둥글게 퍼짐.
피니쉬: 길고 묵직한 여운. 블랙 커피, 가죽, 말린 자두의 느낌이 남으며, 끝으로 갈수록 견과류 껍질의 씁쓸함, 오크의 스파이스, 다크 초콜릿의 씁쓸한 단맛이 부드럽게 마무리됨. 따뜻한 스파이스 계열의 여운이 오래 지속됨.
질감: 크리미하고 점도 있는 오일리한 텍스처. 혀 전체를 감싸는 부드러움 속에 밀도 높은 풍미가 천천히 퍼짐. 단맛이 강하지만, 단조롭지 않고 스파이스와 텍스처가 밸런스를 잡아줌. 고급 디저트 와인을 연상시키는 무게감 있는 질감.
가격 : 쇼핑백(1.25CAD)이 포함되어있긴 하지만, 세금 포함 210CAD.
당시 캐나다 달러 환율이 1,000원 정도 했으니 약 21만원 정도 되는 셈이다. 퀄리티 대비 가격도 매우 합리적이라 놀라울 정도.
캐나다 프로젝트가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있기 때문에, 내가 살면서 몬트리올이나 퀘벡을 언제 또 갈 일이 생길까 싶은 마음이 든다(간다고 하더라도 이 술을 또 만나기는 어렵겠지만). 캐나다 프로젝트는 내 커리어 면에서도, 인생 전반의 경험 면에서도 많은걸 나에게 남겨줬다. 남편이 3주정도 캐나다에 와서 지낸 시간도 돌이켜보니 참 좋았다. 중간중간 매콤함이 있긴 했지만 달콤한 순간들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살면서도 계속 진한 여운이 남을 것 같다. 마치 이 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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