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데일리샷 아이쇼핑을 좋아한다. 그냥 아이쇼핑은 왠지 오늘 당장 사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것만 같고 왠지 오늘 꼭 필요한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데 데일리샷 아이쇼핑은 '우와 이건 무슨 맛일까' 싶으면서도 당장에 바로 이걸 사야지, 꼭 내일 내 집에 이 녀석을 들여놔야지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아서 아이쇼핑의 만족감이 있으면서도 묘한 평온함이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아이쇼핑이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아이쇼핑의 시작은 늘 남들이 뭘 사나 구경하는 '베스트' 목록에서 시작한다. 그날그날 시장에선 어떤 제품이 사랑을 받는지, 남들은 뭘 갖고싶어 하는지 보는 일을 글로 적으려다보니 왠지 좀 변태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아무튼 베스트 목록을 구경하는 건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다. 그리고 꽤나 오랫동안 베스트 목록에 자리하고있던 맥주가 있었다.
세인트 버나두스 앱 12. 샴페인을 떠올리게 하는 병의 모양에 뭔가 종교적인 느낌이 나는 아저씨가 그려져있다. 세인트 버나두스 라는 이름을 보아하니 저 아저씨가 세인트 버나두스구나, 하는 것 정도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앱 12. 나중에 찾아보니 세인트 버나두스(라벨에 있는 친근한 미소의 아저씨)는 세인트 버나두스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맥주의 정체성과 브랜드 스토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수도원이 맥주를 만들던 전통을 현대적으로 이어받은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가 독일에 갔을 때, 맥주를 마시기 위해(적어도 종교가 없는 나는 그랬다) 안덱스(Andechs) 수도원에 들른 적이 있었다. 남편이 거기에 가서 맥주를 마셔야 한다며 가보자고 해서 '무슨 수도원에 맥주를 마시러 가..' 라고 생각했는데, 중세시대 유럽에서 안전한 음료를 만들기 위해 맥주를 양조하며, 자급자족과 순례자 접대를 해온 전통 때문에 수도원들 중에 맥주 맛집😋이 꽤 있다고 한다. 뭐, 정확히 맥주 맛집 수도원의 순위를 매기는 기관같은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챗지피티한테 맥주 맛집 수도원 베스트 10을 알려달라고 하면 안덱스수도원은 없어도 이 '세인트 버나두스'를 제조하는 '베스트블레테렌 수도원'은 5위 안쪽으로 알려준다. 안덱스도 충분히 맛있었는데, 그것보다 더 대단하다고?ㅎㅎ
세인트 버나두스 앱 12는 정확히는 베스트블레테렌 수도원에서 만드는 건 아니고, 초기에 베스트블레테렌 수도원에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수도원에서 제공한 레시피로 세인트버나두스가 맥주를 양조해 판매했다고 한다. 그러던 후에 1992년에 트라피스트 맥주가 수도원 내에서만 생산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생기면서, 트라피스트 인증을 받지 못하는 세인트버나두스는 베스트블레테렌 레시피의 전통과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독립된 브랜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트라피스트 맥주라는게, '로마 가톨릭의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소속된 수도원에서 생산된 맥주를 의미(전세계에서 단 11곳밖에 인증받지 못했다고 한다)하는데, 수도원 내에서 비영리를 목적으로 생산되어야 하며, 수도사가 직접 관리하거나 통제하고 전통적이고 고품질의 양조방식을 유지해야 받을 수 있는 인증이라고 한다. 이런 트라피스트 맥주는 각 수도원의 고유한 레시피와 효모를 사용하여 양조되기 때문에 맥주마다 독특한 풍미를 가지고있는데, 스타일에 따라 '싱글(가볍고 낮은 도수, 4~5%), 더블(진한 갈색과 달콤한 몰트 풍미, 6~8%), 트리펠(밝은 금색과 높은 도수, 드라이한 맛 8~10%), 그리고 쿼드루펠(가장 강하고 진한 맛, 10% 이상)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리고 이 트라피스트 맥주 중에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맥주가 아까 얘기한 베스트블레테렌 맥주이고, 쿼드루펠 스타일이라고 하는데 그와 동일한 레시피를 사용한 게 세인트 버나두스 앱 12라는 것이다. 세인트 버나두스 앱 12는 트라피스트 맥주 인증은 받지 못했지만, 전설적인 맥주인 베스트블레테렌 맥주와 함께 유명한 쿼드루펠 스타일로 이름을 알리고있다.
아까 잠깐 이름 이야기를 하다 말았던 것 같은데, 세인트 버나두스는 양조장의 이름이자 이러한 전통을 의미하고, 앱(Abt)역시 네덜란드어로 수도원장(Abbott)을 의미한다고 한다_전통적으로 가장 고급스럽고 특별한 맥주에 이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12는 맥주의 강도와 관련이 있는데, 숫자가 높을수록 농도가 진하고 결과적으로 더 높은 알코올 도수와 강렬한 풍미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서론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본의아니게 아주아주 길어졌는데, 그렇게 맛본 세인트 버나두스 앱 12는 독특하고 특별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흑맥주를 좋아하는 편이라 달달한 코젤다크도 좋아하고 간장맛이 나는 기네스도 제법 즐겨 마셨다. 흑맥주와 비슷하다는 정도만 대충 알고있던 나는(엄밀히 말하면 같은 상면발효 계열의 포터나 스타우트와 유사하지만, 쿼드루펠은 전혀 다른 술이다.) 여기서도 비슷한 향이 날걸로 예상을 했었는데, 막상 마셔보니 꽤나 다른 스타일이었다. 달콤하고 복합적인 벨기에의 에일인 쿼드루펠은 로스팅 풍미가 강조된 영국 에일인 흑맥주와는 가지고있는 풍미나, 단맛의 깊이감이 달랐다. 씁쓸하고 야영 좋아하고 거친 느낌이 나는 흑맥주에 대비해서, 쿼드루펠은 좀더 부잣집에서 자란 첫째아들의 쌀쌀맞지만 달콤한 츤데레같은 스타일의 술이다. 나는 오늘부로 흑맥주를 좋아한다는 말을 바꿔야 할 것 같다. (부잣집 아들st라서는 아니고) 나는 사실 쿼드루펠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테이스팅 노트
색상 : 짙고 검붉은 갈색 (Dark Mahogany)
아로마 : 무화과, 건포도, 대추같은 달콤하고 농익은 과일의 향이 우선적으로 느껴지며 캐러멜, 꿀, 흑설탕의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퍼짐. 벨기에 효모 특유의 후추, 정향 같은 향신료 느낌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며 초콜릿, 구운 빵, 살짝 느껴지는 토피향이 첨가됨.
테이스트 : 몰트에서 오는 캐러멜과 흑설탕의 깊고 진한 단맛이 첫 모금에서 강렬하게 느껴지고, 향에서 느껴졌던 건과일의 풍미가 맛으로 이어져 달콤하고 풍부한 맛을 선사한다. 효모에서 오는 은은한 스파이시함이 단맛을 적절히 균형잡아주며 살짝 드라이하면서 초콜릿과 커피의 쌉싸름함이 마무리를 장식함. 10%의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알코올이 과하게 튀지 않으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짐.
피니쉬 : 높은 도수(10%) 덕분에 마신 후 입안에 따뜻함이 오래 남고 알코올의 존재감이 느껴지지만 과하지 않고 부드럽게 퍼져나감. 캐러멜과 흑설탕에서 오는 달콤한 여운이 지배적이며, 건과일의 풍미가 미묘하게 이어짐. 피니쉬가 달콤하지만 지나치게 끈적이지 않고, 약간 드라이하게 마무리되어 맥주의 복잡한 풍미를 정돈하고 깔끔한 느낌을 줌. 미세한 초콜릿, 커피 같은 구운 몰트의 쌉싸름함이 마지막에 살짝 남아 단맛과 균형을 이루고, 벨기에 효모 특유의 스파이시한 뉘앙스와 향신료 느낌이 은은하게 피니쉬를 장식함.
질감 : 부드럽고 크리미하며, 높은 탄산감이 있지만 부드럽게 느껴져 목넘김이 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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